직책과 직급의 의미가 인생 전체에서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내려놓게 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 이름들 역시 희미해질 것이라는 점도 안다. 그런데도 사람은 쉽게 그것을 놓지 못한다.
겉으로는 이제 내려놓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정말 그 상황이 닥치면 마음 한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익숙했던 자리, 사람들의 시선, 오랜 시간 자신을 설명해주던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을 상상하면 두려움이 먼저 올라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두고 양가적이라고 말한다.
놓고 싶지만 놓지 못하는 마음.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잃고 싶지 않은 감정.
생각해보면 사람은 늘 그런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얼마 전 한 대표님의 장인어른 장례식장에 조문을 간 적이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분께 지난 30년의 직장 생활은 어떠했는지 여쭤본 적이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분은 몇 마디로 자신의 시간을 압축해서 이야기해주셨다.
국내 4대 그룹 중 한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금융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에는 정부기관과의 억지스러운 합병 과정도 겪었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안정적이고 앞길이 보장된 길처럼 보였지만, 살아오는 동안 세 번 정도의 큰 고비를 겪었다고 했다.
두 건의 큰 송사에 휘말렸고, 건강 악화로 큰 수술까지 받았다. 그 과정 속에서 겸손을 배우게 되었고, 몸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며 술도 끊게 되었다고 했다. 운동의 필요성 역시 절실히 느끼게 되었지만, 아직은 스스로 게으른 사람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담담하게 이어진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화려한 성공담도 아니었고, 자신을 과장하는 말도 없었다. 오히려 지나온 시간 속에서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짧은 대화 속에서 문득 알게 되었다.
사람을 오래 버티게 만드는 것은 결국 직책이나 직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겸손함.
견디는 힘.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태도.
그리고 아픔을 겪고도 다시 살아가려는 마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며 한 사람의 분위기와 얼굴을 만들고, 결국 그 사람만의 깊이를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대표님의 묵묵하지만 단단한 인상 역시 아마 그런 시간들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리더의 모습에는 정답이 없다. 산업마다 다르고, 살아온 환경마다 다르며, 사람마다 모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누군가는 강한 추진력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누군가는 조용한 신뢰로 조직을 버티게 만든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는 것 같다.
지금의 그들을 만든 것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들과 그 시간을 견뎌낸 과정이라는 점이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지나온 시간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직함이 사라진 뒤에도 끝까지 남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태도로 삶을 견뎌왔는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