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의 기록

감투를 벗는 순간 비로소 보이는 것들

2026. 05. 18.· 성장
#존재#정체성#자기이해#책임

장애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분명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 하나만으로 한 사람의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정의할 수는 없다.

어쩌면 장애뿐만이 아니다.

직책도 그렇고, 직급도 그렇고, 학위도 그렇고, 사회적 명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이름과 역할을 얻는다. 누구는 팀장이 되고, 누구는 대표가 되며, 누구는 박사라는 이름을 얻고, 누구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그것이 나를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이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곧 나 자신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예상하지 못한 프로젝트를 계기로 장애인들과 함께 협업하며 사업화를 고민하게 된 적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각자의 역할을 조율하며, 함께 방향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문득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위치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장애이든, 직책이든, 경력이든, 전문성이든, 혹은 오랜 경험이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직함을 말하며, 누군가는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말한다.

모두가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마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 속에서 살아가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자신이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욕망은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만들어놓은 틀 안에 가두기도 한다.

직책이 나를 설명하기 시작하고, 경력이 나를 대신 말하며, 학위가 나의 가치를 대신 증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사람은 어느새 감투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투가 곧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그 이름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명함을 내려놓아야 하고, 직함은 사라지며, 조직은 떠나게 되고, 사람들이 나를 불러주던 이름들도 하나둘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사람은 진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감투를 벗는 순간 비로소 시작되는 승부.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고, 익숙했던 혜택과 관계의 보호막이 사라지고, 오직 나 자신만으로 세상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들.

그때 비로소 사람은 묻게 된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보면 결국 오래 남는 것은 화려한 이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감각.

상처 입은 사람을 조용히 품어줄 수 있는 여유.

다름을 받아들이고,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넉넉함.

그리고 상황이 바뀌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

어쩌면 그것들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만이 끝까지 지켜가야 할 마지막 경쟁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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