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의외로 자주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결정은 누군가가 내렸지만, 비난은 다른 누군가가 감당하는 모습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무자의 판단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었고, 누군가는 그 방향을 실행하는 역할만 맡았을 뿐인 경우가 적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방식이 결코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더 정교해진다. 조직의 방향은 자신이 결정하되, 불편한 말은 다른 사람이 하게 만들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동은 참모들이 먼저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한 발 물러선 채 상황을 바라본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중함처럼 보일 수 있다. 때로는 덕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더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자신의 평판을 지키려는 계산이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삼국지를 읽다가 유비가 익주를 얻기 위해 움직이는 장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비는 조조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은 충직함과 어짐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쉽게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높은 도덕성과 신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문열은 이 대목을 다르게 해석한다. 유비의 말 속에는 혹시라도 훗날 세상의 비난이 생긴다면, 그것을 아랫사람들이 감당하게 만들려는 의도 또한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책략과 덕목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생각해보면 조직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구성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불편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는 한 걸음 물러선 채 누군가가 대신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리더들 말이다.
이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직이라는 곳은 이상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때로는 정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이해관계는 복잡해지고, 모든 것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어려운 순간도 분명 존재한다.
문제는 정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정치의 방향이다.
조직을 살리기 위한 선택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선택인가.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한 계산인가. 아니면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한 계산인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패턴을 기억하게 된다. 누가 어려운 순간 앞에 직접 나섰는지, 누가 조용히 뒤로 물러섰는지, 누가 함께 비난을 감당했는지 말이다.
리더의 영향력은 좋은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불편한 순간에 어디에 서 있었느냐로 결정된다.
평판은 말로 만들어지지만, 신뢰는 책임지는 모습으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