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저 정도의 예술품 하나만 손에 넣어도 평생을 부자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 미술 범죄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한다. 뉴스에서 보았던 수천억 원짜리 그림을 훔쳤다고 해서 그것이 곧 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술품은 현금처럼 바로 거래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작품의 진위 여부는 물론이고, 이전 소유자가 누구였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이동해왔는지, 어떤 공간에 보관되어 있었는지까지 모든 기록이 함께 따라다닌다. 한 점의 그림이 단순히 그림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지나온 시간과 사람들까지 함께 가치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품의 세계에서는 작품 자체만큼이나 ‘누가 가지고 있었는가’가 중요하다. 같은 작품이라도 누구의 손을 거쳐왔는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고, 때로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 가격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이력을 쌓아간다. 어디에서 공부했는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어떤 조직에 몸담았는지, 누구와 함께 일했는지, 어떤 성과를 만들었는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씩 축적되며 결국 한 사람을 설명하는 이력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대부분 자신의 이름만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팀을 맡고 있습니다.”
“○○ 분야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었습니다.”
“현재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대부분 자신이 속한 조직, 역할, 직책, 경력을 함께 이야기한다. 마치 예술품에 붙어 있는 출처와 소장 이력처럼, 사람에게도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경험들이 하나의 태그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마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속은 안정감을 주고, 역할은 존재의 이유를 설명해주며, 경력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언어가 된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이 ‘나를 설명하는 도구’를 넘어, ‘나 자체’가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직장이 곧 내가 되고, 직책이 곧 나의 가치가 되며, 성과가 곧 존재의 이유가 되어버리는 순간들. 그러다 그것을 잃게 되는 날, 사람은 마치 자신 자체를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을 경험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생 무언가에 소속되며 살아간다. 가정, 학교, 회사, 사회, 공동체. 그리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이름과 역할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문득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나는 과연 그 모든 이름을 떼어놓고도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인가.
직책이 사라져도, 명함이 없어져도, 소속이 바뀌어도, 누군가에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인가.
어쩌면 성숙해진다는 것은 더 화려한 이력을 쌓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붙어 있는 수많은 태그를 내려놓고도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사람은 더 이상 어디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