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의 기록

고인물들의 향연

2026. 05. 11.· 조직
#조직#변화#시스템#신뢰

한 회사에서 10년 이상 근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다녔다는 의미만을 가지지 않는다. 그만큼 조직의 흥망성쇠를 가까이에서 지켜봤고, 수많은 의사결정과 실패, 성공과 좌절의 순간들을 몸으로 겪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숫자로는 표현되지 않지만, 그 시간 속에는 조직만이 가진 기억과 분위기, 보이지 않는 규칙과 암묵적인 질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새로운 리더가 부임한다.

짧은 시간 동안 조직을 훑어보고, 주요 인력들을 만나고, 자료를 검토하며 현재의 문제점을 빠르게 정리한다.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성공 사례와 이전 조직에서의 방식들을 떠올리며, 이곳에 필요한 변화의 방향을 그려본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 맞는 말이다.

문제는 조직이 늘 정답을 몰라서 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일 때가 많다. 흔히 ‘고인물’이라 불리는 사람들 말이다.

이 표현에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익숙함에 안주하고, 새로운 것을 거부하며, 자신들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처럼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모습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장면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알고 있다.

왜 이전의 변화들이 실패했는지.

왜 좋은 제안들이 실행되지 못했는지.

왜 뛰어난 인재들이 결국 회사를 떠났는지.

왜 회의실에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지.

그들은 수없이 반복된 기대와 실망을 경험해왔다. 그래서 때로는 조심스럽고, 때로는 무덤덤하며, 때로는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저항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현실 감각이 숨어 있을 때도 많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사람은 속도를 원하고, 오래 버텨온 사람들은 현실을 이야기한다.

한쪽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이미 실패했던 과거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두 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조직은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지금 이대로 머무르려는 힘과, 반드시 바꾸려는 힘.

둘 중 어느 쪽이 더 옳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싸움에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면 대부분 조직은 익숙한 방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변화는 단순히 새로운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변화는 먼저 조직의 기억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리더가 진정 변화를 만들고 싶다면, 오래된 사람들을 먼저 바꾸려 하기보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방식이 왜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무엇에 지쳐 있는지를 먼저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함께 새로운 길을 설계해야 한다.

혁신은 과거를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된 시간 위에 새로운 방향을 덧입힐 수 있을 때, 비로소 조직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인물은 늘 변화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가장 오래 버텨온 사람들이야말로, 조직이 다시 움직이기 위해 반드시 함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동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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